삼국지에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쫓는다’는 말이 있다.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의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추격한다. 거의 따라잡는 순간, 홀연히 촉나라 병사들이 깃발을 올리고 북을 울리기 시작한다. 커다란 깃발에는 ‘대한승상제갈무후(大漢丞相諸葛武侯)’란 글자가 펄럭인다. 그리고 여남은 장정들이 밀고 오는 사륜거에는 윤건을 쓰고 깃털부채를 든 제갈량이 단정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크게 놀란 사마의는 계책에 말려들었다고 여기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난다. 그러나 사실은 수레 위에 있던 제갈량은 나무로 깎아놓은 조각상이었던 것이다.
어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옥중편지를 국민들과 야당 정치권에 내놓았다. 핵심 요지는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드디어 감옥에 갇힌 몸으로 4·15 총선의 지휘봉을 잡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박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다. 생사의 기로에 빠진 보수 세력을 구출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하나로 힘을 합쳐달라’는 호소가 ‘신의 한수’로 바람몰이를 해서 야권이 크게 승리한다면, 박 전 대통령은 제갈공명이 그랬던 것처럼 4월 총선에서 "죽은 권력이 살아있는 권력을 붙잡는" 첫 경험을 하게 해 줄 것이다.
핵심 요지의 한 문장에는 여러 메시지가 함축돼 있다. ‘기존 거대 야당’, 이 말은 미래통합당을 말한다. ‘거대 야당’, 즉 ‘거대’라는 말을 썼다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통합당이 몸집을 부풀려 외연을 최대한 넓혀가고 있다는 점을 박 전 대통령이 크게 인정하고 격려했다는 뜻이다. ‘태극기를 들었던 모두’라는 부분도 의미심장하다. 이 부분은 우리가 흔히 ‘태극기 세력’이라고 부르는 ‘박근혜 적극 지지층’ 뿐만 아니라, 지난해 10월3일 개천절 날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던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폭넓게 아우르는 말이다. 그 다음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로 힘을 합쳐 달라’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란다" 등등 이 ‘하나’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거대 야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대의명분 앞에 다른 모든 것들은 일단 접어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에게 닥친 가장 큰 걱정거리로서 첫째 ‘북한의 핵 위협’ 그리고 ‘우방국들과 관계 악화’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국민들이 애타게 듣고 싶었던 말을 박 전 대통령이 정확하게 지적해준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많은 분들이 무능하고 위선적이며 독선적인 현 집권 세력으로 인해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를 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고, ‘현 집권 세력’이라고 지칭하면서도, 그 특징을 ‘무능’ ‘위선’ ‘독선’ 세 가지로 압축해서 말했다. 외교, 안보, 경제, 부동산…, 그리고 최근 코로나 방역에 이르기까지 좌파진보 집권세력의 무능은 이미 입증되어 있다. ‘조국 사태’ ‘울산 선거공작’ ‘유재수 감찰 무마’ 등에서 드러난 집권세력의 위선과 내로남불도 이미 호가 났던 것이며,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자신들만 옳다고 우기는 독선과 아집 또한 국민들이 넌덜머리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이것을 박 전 대통령은 ‘무능, 위선, 독선’, 세 단어로 정리해버린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이번 메시지는 옥중 서신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집권세력이 아무리 자신들만의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어도, 전직 대통령이 ‘옥중 서신’으로 의사 표시를 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현실은 거꾸로 그 ‘감옥으로부터의 편지’라는 점 때문에 국민들의 마음을 울리는 역설적인 전파력과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 또 이번 메시지는 단정하게 써내려간 친필 서한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수필집을 낸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면서 문인이다. 한 땀 한 땀 자수를 뜨듯 문장을 다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교안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박 전 대통령 감방에 책상 하나 넣어주지 못했던 것, 그래서 황교안 대표의 면회조차 거절했던 과거, 유승민 의원에 대한 ‘배신자’ 앙금, 박 전 대통령은 이런 것들을 되씹을 때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거대 야당이 무조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에서의 통 큰 결단과 자기희생적 통찰만이 위기에 몰린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청와대와 민주당에는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당장 여권에서는 "보수 진영이 하나로 뭉치면 수도권 접전지에서 여권이 불리할 것"이라는 걱정이 나온다. 민주당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총선에 개입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면서 "박 전 대통령은 자중하고 탄핵의 죗값을 치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자가당착 같다. 왜냐하면 ‘총선 개입 선언’이 맞기 때문이다. 그것도 적극적인 개입이다. 둘째 ‘탄핵의 죗값’을 치르라고? 이미 감방에서 그것을 치르고 있는데, 뭘 더 어쩌라는 말인가.
물론 야권 일각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의 등장이 오히려 총선에서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탄핵의 정당성’ 여부가 다시 점화되면 여권에서 진보층이 결집하는 대신 야권에서는 ‘중도층’과 ‘태극기 세력’이 서로 배척하는 갈등을 빚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자유공화당이 미래통합당과 합쳐지는 과정에서 지분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공화당의 조원진 공동대표는 "통합당의 공천 작업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타협과 극복 가능한 것들이다.
이번이 박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 제1호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이 오는 4월15일까지 제2호, 제3호, 연달아 나올 수도 있다고 본다. 이번에 박 전 대통령이 하나로 뭉치자고 한 메시지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 박 전 대통령의 승복 연설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도 박 전 대통령은 "경선 과정을 잊고 대선 승리를 위해 함께하자"고 했었다. 올해 초부터 많은 정치 평론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있다. ‘황교안, 유승민, 안철수’, 세 사람이 한데 뭉치면 4월 총선은 반드시 크게 이길 수 있다고 했었다. 이제 황교안·유승민은 미래통합당으로 손을 잡았고,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다. 이제 자유공화당까지 한 울타리로 들어온다면 보수진영은 2012년 총선 이후 8년 만에 또다시 통합 단일대오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선거의 여왕’ 박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지휘하기 시작했다.
2020-03-05 08:58:39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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