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째 큰비만 오면 마을 잠겨, 지뢰까지 떠내려와… 더 못살겠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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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 났다고 국무총리와 대통령 부인이 찾아와 위로하고 사진 찍더니 아무런 대책이 없다. 주민들의 고통을 봐놓고도 외면하는 건가.”

21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60·70대 주민 30여명이 집회에 나섰다. 강원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 마을 주민들이다. 67가구, 139명이 사는 이길리는 지난달 초 철원에 내린 700㎜의 물 폭탄에 한탄강이 범람하며 마을 전역이 물에 잠겼다. 강둑을 넘어선 흙탕물은 논과 도로는 물론 집 안까지 들이찼다. 주민 139명은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수마가 할퀴고 간 마을은 처참했다. 그릇과 주걱 등 집 안 가재도구는 거리로 쏟아졌고, 토사는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심지어 안마당에선 물에 떠내려온 지뢰가 수십 발 발견됐다.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강원 철원군 이길리 주민이 ‘집 안에 지뢰폭탄’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집단 이주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길리는 1979년 정부가 북한에 대응해야 한다며 저지대에 조성한 선전촌(村)이다. 큰비가 올 때마다 물에 잠겼고 전방 지역의 지뢰가 안마당까지 떠내려와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해왔다. /연합뉴스

이길리 주민들이 청와대에 이주 대책 호소에 나선 것은 이 마을이 1979년 북한에 대응해야 한다며 정부 주도로 형성된 선전촌이기 때문이다. 북한 오성산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마을은 저지대에 자리 잡게 됐다. 수해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이 생길 때 이주해온 주민 김종락(78)씨는 21일 본지 통화에서 “1979년 마을이 조성될 때도 주민들이 수해 위험이 높으니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면서 “그런데도 북한에 맞대응하기 위해 굳이 이 자리에 마을을 조성해야 한다고 정부에서 압력을 넣어 주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또 “주민들은 마을을 돌봐주겠다는 정부의 말을 믿고 토지비와 건축비를 모두 지불했다”면서 “결국 정부가 국민을 이용해 먹고 나 몰라라 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1996년에 이어 1999년, 그리고 올해까지 큰 침수 피해를 겪은 주민 주정희(74)씨는 “이길리 주민은 40년 고통을 오직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버텼다”면서 “그러나 나라는 우리를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씨는 “총리나 대통령 부인 모두 침수로 힘들어하는 주민들의 일상을 생생히 봐 놓고 이렇게 외면하는 것에 놀랐다”면서 “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특히 이길리의 침수 피해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96년과 1999년에도 범람한 한탄강이 마을을 덮쳤고, 주민들은 겨우 목숨만 건졌다. 주민들은 이날 집회에서 “25년째 큰비만 오면 수해 피해다, 더는 못 참겠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집단 이주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또 성명을 통해 “올여름 장마로 온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수해 복구를 하느라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냈다”면서 “수해 다음 날 마을 안마당에서 여러 발의 지뢰가 발견되는 등 주민 안전은 여전히 커다란 위협을 받는 상황”이라고 했다.

주민들은 “집터를 마련하고 집을 새로 짓는 데 적어도 2억원에 가까운 비용이 든다”면서 “마을 주민 대다수가 고령이라 추가 지원 없이는 집단 이주가 불가능하다.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김종연(54) 이길리 이장은 “들녘에 노랗게 익은 벼는 지뢰 위험 때문에 수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북 선전에 평생 이용당한 주민을 위해 체계적인 이주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September 22, 2020 at 01:0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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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째 큰비만 오면 마을 잠겨, 지뢰까지 떠내려와… 더 못살겠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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